‘그로테스크(grotesque)’라는 용어는 15세기 말, 르네상스 시기에 고대 로마의 지하 유적에서 발견된 벽화 장식에서 유래한다. 로마의 지하 공간, 즉 ‘동굴(Grotto)’에서 발견된 양식이기에 ‘그로테스크’로 명명된 이 장식 디자인은 당대의 전통적인 고전 미술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인간의 신체, 동물의 형상, 식물의 모양 등이 기괴하고 환상적으로 결합한 이 형상은 기존의 고전적 조화와 질서를 따르지 않으며, 당시의 전통적 재현과 미적 기준과도 같았던 자연주의적 조형 언어를 위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미 이에 대해 고대 로마 시대의 건축가이자 엔지니어, 이론가인 비트루비우스(Marcus Vitruvius Pollio)는 이와 유사한 형상에 대해 ‘부적절한 취향’이라 비판하며, 비현실적이고 자연을 위반한 기이한 형상이라 언급했다는 사실은 흥미롭기까지 하다. 그는 이 형상들에 대해 ‘이러한 것들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할 수도 없고, 존재했던 적도 없다’라고 하였다.
본 전시 <기괴하고도, 고결한>은 환상적이고 비자연적인 형상으로 일컬어졌던 ‘그로테스크’, 일반적이지 않기에 기괴하고, 낯설며 때로는 불쾌한 감각까지도 선사했던 양식에서 시작한다. 고전적 아름다움의 이상에서 벗어난 비대칭성과 과잉, 뒤틀림의 미학인 그로테스크는 부조화, 비정상성, 희극과 비극이 극렬히 충돌하는 대립, 혹은 양립하는 형상에 기반한다. 이는 질서와 비질서, 이성과 본능, 인간과 비인간이 맞물리는 전복적 경계의 형상화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상상 속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 체계의 경계면에서 출몰하는 기표이며, 우리가 ‘이질적’이라 여기는 것의 형상을 빌려 세계에 대한 인식을 시각적으로 체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위배의 감각이라고도 볼 수 있는 이 기괴한 이미지는 오늘의 정상성을 비판적으로 재고하고, 일반화된 삶의 양식 바깥으로부터 존재의 조건을 자각하도록 이끈다. 전통적 규범에서 벗어난 형상이 주는 혼란과 왜곡을 수용하고, 불편함이나 낯섦의 미학을 통해 기존의 인식을 되묻는 과정은 보다 적극적인 정동을 촉발한다. 전시는 장식적 디자인으로서의 그로테스크라는 언어를 경유하되, 더 나아가 그러한 이미지가 함의하는 정치적 가능성을 향한다. 즉 비정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시각성의 기저에 깔린 기괴함이나 추함, 환상과 공포의 미학을 경유하는 과정에서 보편이라 일컫는 사회적 규준이 어긋나길 기대하고, 위계화된 그간의 시선을 거부함으로 학습된 인식의 바깥에서 객체 혹은 타자화된 존재의 양식을 살피려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정성윤의 우뚝 선 조각, 그 직립이 갖는 수직적 조형성은 그간의 사회, 정치적 차원에서 권력적 위계를 공고히 해온 형식과는 사뭇 다른 위용을 지니며, 비(혹은 반)규정적 형태를 통해 시각에 기대어온 근대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해체한다. 그간 기계 장치로 만들어낸 유연한 움직임이나 시스템화된 체계적 조각에서 이미지의 운동성을 환기하던 작가는 본 전시에서 육안의 한계 너머에 있는 존재 - 성운(nebula) - 으로 시선을 돌린다. 성운은 인간의 눈으로 다가설 수 없는 거리의 시공을 횡단하는 존재이다. 그 자체로 미지의 대상이며, 그렇기에 다양한 상징적 의미와 이미지의 외피를 둘러쓴 채 때때로 종교나 신화의 서사에 등장한다. 한편, 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눈으로 다가설 수 없는 대상을 관측할 수 있게 하였고, 하나의 아름다운 이미지로 실체를 강화한다. 하지만, 시각의 역능을 연장한 관측은 대상의 표피에 머무를 뿐 그 속에 다가설 수 없음을 역설한다. 기술은 대상의 표면적 환영을 강화할 뿐, 대상의 실재적 본질과 존재론적 깊이에서는 오히려 멀어지게 만드니 말이다. 작가는 이를 검은 천을 뒤집어쓰고 허공으로 솟구친 유령과 같은 입상으로 전환한다. 존재하지만 외피에 둘러싸여 속을 알 수 없는 대상 앞에서 관객의 시선은 단단한 표피에 머무른다. 부피를 지니지만 중력을 거스르고 부유하는 듯한 형상의 불가해성과 압도적인 존재감은 인간의 존재론적 무력감을 환기하며, 경외감은 공포로 치환된다. 심지어 프레임으로부터 뒤틀리며 삐져나온 PVC 조각, 그리고 미사일처럼 치솟은 조각의 색채 -검은색- 은 이러한 감각을 더욱 극대화한다. 검은색은 존재의 부재를 드러내는 동시에 새로운 존재의 출현 가능성을 내포하는, 존재론적 부재의 색이다.1) 그렇게 표면에 담기지 못하고 튕겨 나가는 시선은 시각 경험의 한계를 폭로하고, 빛과 색채가 결핍된 검은색은 공포와 혐오, 그리고 숭고함을 동시에 환기한다. 이제 대상에 대한 감각은 시선이 아닌 심리적 관측으로부터 관찰되고, 변화, 측정되기 시작한다.
한편, 임창곤이 재현해 온 대상은 파편화되고 재배치되는 과정에서 외피로부터는 인지할 수 없던 신체의 감각적 실체에 다가선다. 작가가 회화로 재현하는 대상은 일반적으로 남성의 누드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그의 작업에 놓인 신체를 특정한 성별로 구분하거나, 특별한 인물, 또는 서사에 포박하는 것은 불필요하다. 애초에 그가 그린 몸의 이미지는 분화되고, 다시 결합하는 과정에서 현실의 이미지와 뒤섞이며, 추상화의 과정을 거친다. 남겨진 것은 사물과 같이 분열된 신체, 그로부터 더 도드라지는 각 패널의 기이한 외곽선과 이들이 결착하고 재구성되었을 때 발생하는 이미지의 문제이다. 이는 마치 전통적 규범이 답습해 온 시각적 통일성과 자율성을 거부함으로 신체를 불안정하고 다층적인 정체성의 매개체로 제시하는 듯하다. 실제로 신체는 제도와 규범에 따라 정의되고 규정된다는 점을 상기했을 때, 그의 누드화는 규율된 몸에 대한 저항과 해체를 환기한다. 작가는 분할된 몸의 이미지를 통해 전통적 규범에서 이상적 신체로 제시되었던 남성상을 해체하며 다층적이고 수행적인 정체성을 재현한다. 조각난 몸은 불완전하고 파편화된 주체, 탈정체화된 경계적 존재로서 대상을 위치시킨다. 그렇게 남겨진 패널은 연결된 구조, 혹은 공간에 따로 떨어져 놓인 부분들에서도 낯선 감각을 촉발한다. 즉, 전체와 부분을 오가는 사이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신체의 특정 부분이나 사람에 대한 특징적 표현이 아닌, 신체로부터 비롯된 성질이다. 꿈틀거리듯 극화된 동물성, 관능적인 육체의 감각, 몸 안 내장 기관의 끊임없는 요동에 더 가까운 이것은 패널을 가득 채운 붓질에서 비롯된 신체의 물질성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즉물적인 신체의 표현은 시각에서 여타의 감각으로의 이행을 이끈다. 남성과 여성, 인간과 비인간의 이분법적 경계가 사라진 뒤 목격하는 것은 생명력과 운동성으로 점철된 원초적 이미지이다. 이 과정에서 응시의 대상이었던 누드는 관객의 시선을 수용하는 대신 왜곡하고 단절된 이미지로 우회하고, 전체와 부분의 사이에서 주체와 객체의 관계는 허물어지며 보다 유동적이고 상호적인 조건에서의 시각적 권력관계로 재구축된다.
박예림은 이끼, 나무의 가지와 뿌리, 인적과는 거리를 둔 듯한 현장에서 채집한 유기적 요소들을 결합하고, 그 이미지를 확대,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자연적 무질서 속 고유의 존재 방식을 탐구한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인간 사회로부터 거리를 둔, 혹은 문명 이전과 이후 세계에도 존재했고, 존속할 것만 같은 것들이 존재하는 양식이다. 본 전시에서 작가는 통나무와 가지, 열매와 잎사귀가 이질적으로 교합된 상태를 제시한다. 공생의 논리에서 기원한 본 작업은 얽히고 또 버티며 스스로의 생태를 구축해 나가는 자연의 모습에서 참조한 것이다. 각 부분의 크기와 형태에서 오는 차이나 절단면은 이접의 형식을 극적으로 가시화하며 이종의 기생 구조를 가시화지만, 동시에 염색지로 감싼 표면에 흐릿하게 새겨진 패턴을 통해 단단하게 결속된 구조를 환기한다. 또한 나무를 꿰뚫고 매달린 잎사귀와 열매는 부식된 표면을 통해 몸통이 되는 부분과는 서로 다른 시간성을 담지한 채 엮여 있다. 그렇게 유기적 부패와 인공적 보존의 긴장 관계 속 끈질긴 대화를 조율하는 것만 같은 그의 작업은 마치 동시에 공존할 수 없(다고 믿었)던 시간의 개념까지도 교접하는 식으로 존재한다.2) 그의 작업이 그로테스크해지는 지점은 규율되고 학습된 것, 이성과 합리의 바깥에 기거하는 존재의 양식이 공고히 구축된 체계와 언어를 빌려와 침투한다는 것, 그리고 익숙한 것과 낯선 것의 충돌과 조화가 만들어낸 특유의 생동감이 인간 중심적 시선에 따른 믿음의 체계를 상회한다는 점이다. 그의 작업에는 양립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던 개념들이 작업이라는 몸체를 빌려 함께 정박해 있다. 죽음은 삶과 연결되어 있고, 디스토피아와 유토피아의 이미지가 동시에 상기되며, 문명과 문명의 붕괴 이후 포스트 아포칼립스적 감각이 공존하는 식으로 말이다.
마지막으로, 김옥선은 사진으로 인물, 사물, 자연과 풍경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대상을 담아 왔다. 그들은 줄곧 경계에 존재하는 대상으로서 위치해 왔으며, ‘타자’라는 분류 안에 속하는 존재이다. 이를테면 남성 중심 사회에서 타자화되어 온 여성, 혹은 이방인으로 분류되어 온 외국인이나 재일 교포 2세, 여전히 특수한 경우로 인식되기도 하는 국제결혼 커플과 이성애 중심의 시선에서 성적소수자로 불려온 동성 커플, 그리고 그들의 주거 공간과 사물, 제주도에 뿌리내린 외래 식물종과 같은 것들이다. 작가는 사회, 문화, 역사적 편견이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개개인의 다종다기한, 살아있는 삶에 주목한다. 그렇기에 그의 사진에 담긴 피사체는 일상과 분리되지 않으며, 그들이 소속된 사회문화적 맥락과 영향을 주고받는 역동적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김옥선의 사진에 등장하는 인물과 사물은 평범하지만, 동시에 강렬하고도 생경한 시각적 경험을 선사한다. 하지만, 작가로서 사진에 극적인 서사나 연출의 의지를 더하지는 않는다. 그저 카메라를 가운데 두고 그 너머로 대상을 온전히 대면하려는 태도에서 기인한 그의 작업은 사진을 매개로 관계를 형성하려는 의지로 이어지며, 웃음기 없이 담담하기만 한 대상들의 모습을 담아내고, 그들의 사적공간, 혹은 사물에 시선을 돌리는 식으로 귀결된다. (
그로테스크, 그 기괴함의 미학은 단지 보편적인 미의 규준에서 벗어난 파격이나 추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시각적 질서에 의해 포착되지 않았던 무언가를 마주하는 경험에 가깝다. 보기 싫은 것이 아니라, 보기 어려운 것, 즉 그간 보아온 방식으로는 읽히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체계화되고 학습된 것의 바깥에 존재하던 것이 시스템의 안에서 인지되어 충돌하는 순간에 양식화된 것이며, 이로써 우리는 그간의 인식을 되물을 수 있게 된다. 그런 면에서 이는 오히려 사회적으로 용인된 보편적 미감이 흐트러지는 순간 형식 너머에 잠재된 인식론적 혼란이 폭로하는 이미지의 정치적 가능성과도 같다. 익숙함에서 미끄러진 이 낯선 형상은 공포와 불편함을 유발하지만, 바로 그 감각의 충돌이야말로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고 구성해 온 방식을 되묻게 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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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렝 바디우는 그의 저서 『검은색』에서 검은색을 단순한 색채가 아닌, 무색이자 빛의 부재, 그리고 색채의 결여로 바라본다. 그에 따르면 검은색은 모든 색을 흡수하는 동시에 어떠한 의미의 부여도 저항하는 순수한 형태로서의 자율적 힘을 가지는 색채라고 할 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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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측정과 통제에 대한 근대적 욕망은 시간을 정량화하려는 시도로 이어졌으며, 두 개의 것이 하나의 공간에 존재할 수 없다는 불가입성(impenetrability)을 골자로 한다. 즉, 동일한 공간에 하나의 ‘순간’만을 존재, 연속하게 함으로써 시간은 보다 일정하고 예측 가능한 개념으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크레디트
참여작가 : 김옥선, 박예림, 임창곤, 정성윤
기획/ 글 : 김성우
공간조성 : 무진동사
영상 장비 및 테크니션 : 아워레이보, 올미디어
사진 : CJY ART STUDIO (조준용)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25 시각예술창작산실